사 설


 


 

‘머리가 좋다’는 말엔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계산을 잘하거나, 논리적이거나, 지식이 풍부하거나, 아니면 단순히 시험을 잘 보는 것도 있다.
기억력이 뛰어나도 좋은 머리에 포함된다. 과거에 만난 사람과의 대화 내용뿐 아니라 그 사람의 옷과 신발까지 모두 기억하는 이를 보면 경외감마저 느낄 때가 있다.
하지만 인간의 뇌가 모든 걸 다 저장하진 못한다. 아무리 기억력이 뛰어난 사람이라 해도 생의 모든 경험을 기억할 순 없다. 그랬다간 뇌 용량을 초과해 터져버릴 지도 모른다.
특히 아픈 기억, 슬픈 기억, 비참한 기억, 분노의 기억을 모두 잊지 않고 저장해 두고 있다간 극심한 스트레스 때문에 병에 걸릴 수도 있다.
그래서 때론 망각이 좋은 치유제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망각이 무조건 좋을 수만은 없다. 부당한 방법으로 권력을 획득하거나, 재임 중 온갖 만행을 저지른 독재자는 국민을 망각의 늪에 빠뜨리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렇게 우민(愚民)이 된 국민은 비명에 쓰러져간 이웃에 대한 기억보다 우연히 손목시계 하나 받은 기억을 영광스럽게 생각하며 독재자를 길이길이 추억한다.
인간에겐 기억을 하는 일도, 망각을 하는 일도 둘 다 매우 중요하다. 기억을 하려면 정확하고 뚜렷하고 올바른 것을 기억해야 하고, 망각을 하려면 잊고 싶은 것이 아닌 잊어도 되는 것을 잊어야 한다.
기억해주길 소원하는 사람을 보면서 이제 그만 잊으라고 강요하는 건 무례하고 비겁하며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가장 아름다운 계절 4월은 역설적으로 가장 잔인한 달로 표현된다. 시인이 그렇게 노래해서가 아니라 유독 대한민국의 4월은 큰 일이 많았다.
조금 멀게는 제주4·3항쟁과 4·19혁명이 있고, 최근엔 세월호 참사가 있다.
대한민국 역사에 세월호는 가장 슬픈 이름으로 기억될 것이다. 어른이 아닌 아이들이 죽어서 더 슬프고, 맹렬히 저항하다 죽은 게 아닌 너무 온순해서 죽은 게 더욱 슬프다.
많은 국민들이 ‘가만히 있으라’는 말과 ‘이제 그만 잊으라’는 폭력에 맞선 덕분에 4월에 떠난 세월호는 3년의 긴 여행을 마치고 다시 4월에 뭍으로 올라올 수 있었다.
지금 대한민국의 2017년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 아닌 ‘가장 뜨거운 달’이 되고 있다.
국민의 손으로 쟁취한 ‘장미대선’ 덕분에 올 4월은 바쁘고 정신없는 달이 됐다.
그리고 다음달, 2017년 5월은 누군가에겐 아픔이 될 수도 있겠지만, 많은 국민들에게 장미보다 아름다운 달로 기록될 것이다. 1980년 5월 광주와 함께, 2017년 5월 대선도 역사에 길이 남을 커다란 분기점이 돼야 한다.
그리스 신화 속 죽어서 저승에 가는 망자들은 레테의 강을 건너며 이 강물을 마셔야 한다. 레테는 망각의 여신. 그래서 망자가 이 물을 마시면 이승의 기억을 모두 잊는다.
그러나 아이들은 잊지 않았다. 하늘로 올라간 아이들이 기억하고 염원해 줬기에 아홉 명이 갇힌 세월호가 밝은 빛을 볼 수 있었다.
망각의 반대편엔 기억만 있는 게 아니다. 기억하고 있는 것 중 재생되는 것을 파지(把持)라고 한다. 기억만 하고 행동하지 않는 건 무기력하다. 그래서 파지는 행동의 원천이 될 수 있다.
기억하고 행동하고 싸울 수 있어야 인간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을 망각하는 건 죄악이다.

저작권자 © 한국아파트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