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

 

 

오 정 순  수필가


친구네 아파트 정원에는 큰 동백나무가 자란다. 친구가 동백나무 묘목을 키우다가 둥치가 커져서 정원으로 내놓았다. 정들여 키운 사람이라 해마다 꽃이 피면 친구는 사진을 찍어 카톡에 올려준다. 화분을 내놓은 첫 해에는 사람들이 덕분에 동백꽃을 본다고 고맙게 여기며 감상하곤 했지만, 어느 해부터 자연스럽게 아파트의 정원수처럼 인식하게 됐다.
나는 문학기행차 하동에 갔다가 최참판댁 앞 노점에서 천리향 나무 묘목을 사다 키웠다. 몇 해 지난 후 여름에 거름을 주어 땅기운을 맡도록 정원에 내놓았더니 제 세상을 만난 듯 가지를 많이 냈다.
한 여름 뙤약볕도 보약이었고 살랑대는 자연풍도 나무에게 신선한 호흡을 도왔다. 공원을 오가는 사람들의 칭송을 들으며 균형잡힌 수형을 만들어갔다. 누가 봐도 어른나무가 됐다. 한결같이 살기 좋은 세상은 천리향 나무에게도 허락되지 않았다. 영하의 날이 다가오기 전에 월동준비를 해야 하기에 급한 김에 아파트 현관에 들여놓았는데 그만 그 자리에서 겨울을 났다. 
초봄이 되자 꽃봉오리가 귀리를 모아 붙여놓은 듯 다달다달 맺히면서 꽃문을 열 날을 기다리게 했다. 이따금 물을 주러 내려갔다가 계 타는 날 기다리는 사람처럼 꽃 피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봄은 기다리는 사람에게 빨리 오는 것이 아니라 방심하는 사람에게 급하게 온다. 바쁘게 살다가 보니 어느 날 향내가 꽃을 피웠다고 신고를 한다. 한두 송이를 넘어 무리지어 피어나자 향기는 아파트 통로를 통해 계단을 오르며 북상했다. 
나는 화분을 들고 7층 우리 집으로 옮겨갈 요량으로 내려갔다가 그만 향기를 공유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향이 천리까지 간다고 해 천리향이라 이름지었듯 외출했다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 은은한 향이 폐부 깊숙이 파고든다. 향이 아주 묘해서 날숨을 쉬고 오르려고 하면 어느새 깊은 들숨을 쉬도록 가던 발 길을 잡는다. 인격의 향을 맡으면 그 사람 곁에 머물고 싶어지는 것처럼 천리향의 곁에 있고 싶어진다. 
개화 초기의 향에는 신선함이 있었다면 개화 후기의 농익은 향기는 추할 정도로 향이 짙어서 그 향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마치 세제에서 맡아지는 인공향을 닮았다고 화분을 치워달라는 요청도 있었다.  
나무도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일까. 꽃들이 급하게 피고 지더니 벚꽃이 벙글기가 무섭게 정원수 아래로 내몰렸다. 향기는 하늘로 보내고 꽃잎은 땅으로 보낸 다음, 꽃진 자리에서 푸른 순이 세 갈래로 올라와 더 클 것이란  희망을 보여준다. 올 한 해 더 크면 나무는 더 많은 향으로 보답할 것이나, 이제는 그 나무가 내 나무가 아니라 아파트 나무가 될 것이란 생각이 굳는다.
90세 내 어머니는 33평에 홀로 산다. 가재도구를 단출하게 정리했더니 방마다 시원하게 비어있다. 도시에서 빈 공간을 이용하고 싶은 사람들이 수시로 어머니의 빈방에 눈독을 들인다. 심지어는 딸인 나에게까지 종용을 한다. 시골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이 병원을 가거나 외국에서 들어온 사람들에게 숙소로 제공하기를 권하는 바람에 어머니의 마음은 편할 날이 드물다.
어머니가 원해서 받아들이는 사람과 머물기 좋으니까 너나없이 묵어가고 싶어해서 받아들이는 것과는 심적으로 차이가 나겠으나, 홀로의 생활에 익숙해진 어머니는 도우미조차 거부하는 판국이라 그 공간이 때로는 부담스럽게 보인다. 싫거나 좋거나 간에 손녀도 문간방에서 몇 년간 머물다 나가고 나이가 든 조카도 호시탐탐 어머니의 공간을 넘보면서 어머니를 힘들게 한다.
이렇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세상 사람들은 홀로 소유하기에 넘친다 싶으면 은연 중에 넘보는 심리가 깔려있다. 홀로 유지하기 버겁다는 신호가 와도 가볍게 하지 않다가 화분의 나무를 죽이듯 남은 음식을 썩히듯, 전 재산을 빼앗기듯 때를 놓치면 몽땅 잃기도 한다.
모든 것들은 가볍게 소유하고 보호가 필요할 때까지만 자기 것이다. 발코니의 나무도 크면 내 집 나무가 아니고, 통장의 돈도 넘치면 세금이란 이름으로 세상 것이 된다. 생각에서 글로 성장해 발표되면 그 글은 작가의 것이 못된다. 산 것들은 병들지 않는 한 크는데, 일정 한도만큼 크면 내놓을 각오를 해야 한다.
친구네 동백나무, 우리집 천리향 나무, 어머니의 노는 방, 심지어 피땀으로 일군 기업조차도 국민기업이라 하지 홀로의 기업은 아닌 것이다. 애국심이 크고 통치력이 건강하면 하고 싶지 않아도 나랏님이 돼 달라는 청을 듣게 되고 생명의 법칙을 알리고 사랑이 크면 인류를 위해 몸바치는 사람이 된다.
 모든 큰 것은 자기 것이 못된다. 친구는 나무를 볼 눈만 자기 것이고, 어머니는 누운 자리만 어머니 자리이며, 한 끼 먹은 밥만 자기 음식이다. 만사가 관리할 수 있는 만큼만 키우면 사는 게  편하다. 많이 소유하고 싶으면  먼저 그릇을 키우고 지금 그릇도 못 채우고 산다고 생각하면 나무든 사람이든 부지런히 거름줘 더 키워볼 필요가 있다.
 들숨날숨을 반복하며 하늘을 내게 섞고 음식을 먹으며 땅을 취하며 산 것들이 생명을 부지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 궁극에는 다 세상에 내놓고 간다는 것은 명명백백한 사실이다. 물질이든 지식이든 인격이든 보통 사람의 것은 죽어서 세상 것이 되지만 일찍 큰 사람의 것은 살아서 세상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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