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설

봉건시대엔 작은 관리 자리라도 하나 차지하면 벼슬에 올랐다고 득의양양하고 주위의 부러움도 받았지만, 현대 산업사회에 들어서면서는 공무원이 별 인기 없는 직업으로 추락하기도 했다. 박봉에 일은 많고 사회적으로도 별 대접을 받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공무원을 보는 시각이 2000년대를 전후해 급속도로 달라졌다. 예전엔 고등학교 졸업 수준의 학력이면 합격할 수 있었던 9급 공무원 시험조차 고시라고 불릴 정도로 합격에 이르는 길이 험난하다. 예전 신림동 고시촌이 지금은 노량진으로 옮겨왔다고 할 정도로 대졸 공시족이 넘쳐난다.
대기업 관두고 공무원 시험 준비한다는 얘기를 들으면 ‘혹시 성격이 괴팍한 사람 아닐까?’하고 기이하게 여겼던 사례는 이미 오래전의 에피소드가 됐고, 지금은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고 하면 “최고의 평생 직업을 갖게 됐다”는 축하인사가 쇄도한다. 오죽하면 ‘공시폐인’이란 말까지 생겨났을까.
그렇게 선망의 대상이 된 공무원이라면 자부심을 갖고 당당하게 일할 수 있어야 하지만, 간혹 그렇지 못할 때도 있다. 지역사회의 질서를 교란하는 토호세력 때문이다.
토호(土豪)는 봉건시대에 재력과 권세를 가진 지방의 유력 양반을 일컫는 말로 백성의 피와 땀을 빨아먹는 흡혈귀 같은 존재였지만, 지방관리들은 그들의 무단행위를 단속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들은 고리사채로 토지를 강탈하고 농민들을 노비나 머슴처럼 부렸다. 또 뇌물을 주고 세금을 적게 내거나 아예 탈세를 하기도 했다. 탐욕과 약탈은 끝이 없었다.
게다가 정변이나 쿠데타의 후원세력으로 중앙권력을 위협할 때도 있었다. 임금도 이들의 존재에 대해 불안감을 느끼고 힘을 빼앗거나 억누르려 했지만, 성공한 경우는 드물다. 지방관료들이 이미 이들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세상은 지난 옛일이라고 착각하고 있지만, 현대 자본주의 사회라고 해서 이들이 소멸된 건 아니다. 한 언론조사에 따르면 지방 이전 공공기관 세 곳 중 한 곳은 현지 토호나 전문성이 부족한 지역출신 인사가 감사나 비상임이사를 꿰차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언론은 경영정보가 공개된 108곳을 전수조사해보니 33개 기관에서 이런 결과가 나왔다고 보도했다. 지역인사는 지역 기업임원, 지역 정치인, 지자체와 시도의회 인사, 지방 언론인 등으로 나타났다. 이런 사람들이 지역 공공기관의 상층부를 장악하고 있는 한, 공무원들이 공명정대한 업무를 수행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일반 행정직은 말할 것도 없고, 경찰이나 판검사까지 영향권을 벗어나지 못한다. 오래전부터 이권에 깊숙이 개입해 왔고, 지역 여론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세평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공무원들이 이들의 뜻을 거스르는 건, 곧 출세를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서울 모 아파트에서 수억원에 이르는 공사에 입찰과정부터 부정한 방법이 동원되고 시공 역시 하자투성이인 것으로 드러났다. <관련기사 1면> 
이 과정에서 문제를 제기한 관리사무소장이 교체되기도 했다. 보다 못한 입주민들이 나서 구청과 서울시에 특별감사를 요구했지만 해당 관청은 몇 달째 묵묵부답이다. 취재를 해보니 “지금 당장 말할 게 없다”거나 “담당자가 자리를 비웠다”는 회피성 응답만 돌아온다. 입주민들은 공사를 강행한 인사가 해당 지역의 유력자이기 때문에 공무원들이 이도저도 못하는 것은 아닌지 강한 의구심을 나타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맑은 아파트’는 헛 선전에 그칠 수밖에 없다. 중앙정부와 지역수반이 아무리 좋은 정책을 펼치려 해도 아래에서 움직이지 않으면 모든 일이 허사다.
거창한 구호도 중요하지만 지역에서 준동하는 토호세력부터 뿌리 뽑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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