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setNet1_2

풀리지 않는 숙제

기사승인 [1153호] 2020.01.08  13:08:30

공유
default_news_ad1

1941년 12월 7일 새벽, 일본 연합함대가 은밀히 하와이 북서쪽 해상에 도착했다.
본부의 공격명령이 떨어지자 1차 공격대와 2차 공격대로 나뉜 전투기들이 차례로 미 태평양 함대 기지가 있는 오아후 섬 진주만을 향해 이륙했다. 2차 대전을 본격적인 세계대전으로 확전시킨 진주만 공습이 시작된 것이다.
당시 미국은 일본이 태평양을 건너 미국 본토를 직접 공격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고 판단해 경계가 느슨한 상태였다. 이 기습공격으로 애리조나호 등 8척의 전함이 침몰하거나 큰 타격을 입었고, 함선 18척과 180여 대의 비행기가 파괴됐다. 군인도 3,400명이 사상됐다. 그나마 진주만을 벗어나 있었던 항공모함 3척이 공격을 모면한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일본의 계략은 일단 성공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전쟁에 소극적이었던 미국민의 여론을 일거에 역전시켜버렸다. 미국의회는 1명을 제외한 전원찬성으로 일본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다.
“어쩌면 우리가 잠자는 사자를 깨운 것은 아닐까.” 일본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말처럼 진주만 공습은 미국의 참전을 유도해 2차 대전의 향배를 연합국으로 기울게 만든 결정타가 되고 말았다.
1945년 8월 6일. 화창한 여름날 아침, 일본 히로시마 상공에 폭격기가 나타났다. 경보사이렌이 울렸지만, 시민들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히로시마는 긴 전쟁의 와중에 한 번도 공격 받지 않은 도시였다. 이번에도 별 일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지나가던 시민들의 눈에 하얀 섬광이 들어왔다. 한 생존자는 빛이 너무 밝아 손으로 눈을 가렸는데 손가락뼈들이 보였다고 했다. 이 빛을 직접 바라본 사람들은 눈이 멀거나 안구가 녹았다. 투하지 근처의 온도는 3,000~4,000℃가 넘었다. 가까이 있던 사람들은 열로 인해 형체도 없이 증발해 버렸다. 초속 340m의 폭풍은 1.6㎞ 내의 주변지역을 초토화시켰다. 건물들이 완전히 붕괴됐다.
그로부터 사흘 뒤 나가사키에 또 한 발의 원자폭탄이 투하됐다. 단 두발의 폭탄으로 인해 군인과 민간인을 합해 최대 24만6,000여 명이 사망했다. 강제징용으로 끌려간 조선인 4만명 이상이 포함된 숫자다. 미국은 추가 원폭투하 준비도 하고 있었으나, 핵폭탄의 가공할 위력을 절감한 일본이 항복하는 바람에 추가계획은 취소됐다. 항복선언이 조금만 더 늦었어도 일본은 회복불능 상태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역사상 전무후무한 원자폭탄 공격계획을 세운 미국은 ‘원자폭탄 목표 선정위원회’까지 구성해 투하지역을 장기간 면밀히 검토했다. 원폭의 위력을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선 이미 공습을 당해 쑥대밭이 되지 않은 곳이어야 했다. 일본의 심장부인 도쿄, 오사카, 나고야 등은 이미 수백대의 B-29가 훑고 지나간 상태였다. 그래서 1순위로 선정된 지역이 히로시마, 고쿠라, 요코하마, 니가타, 교토였는데 최종적으론 히로시마와 후보에도 없었던 나가사키가 결정됐다.
‘리틀보이’와 ‘팻맨’이란 이름이 붙은 두 원자폭탄은 일본 군국주의의 심장이 아닌 애꿎은 지역에 떨어짐으로써 수많은 민간인 희생자를 만들어 놓은 채 전쟁을 끝낸 주역이 됐다.
악(惡)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처음부터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벌이는 악이고, 다른 하나는 원래 타인에게 피해를 입힐 생각이 없었고, 심지어는 도움을 주기 위해 시작한 것이었으나 나쁜 결과를 초래한 악이다.
결과만 놓고 본다면 악한 의도를 가진 악도 악이고, 선한 의도로 시작한 악도 악이다.
일본의 진주만 공습은 처음부터 세계제패의 야욕을 꿈꾼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악행이었다. 그리고 원폭투하는 전쟁의 참화를 줄이기 위한 미국의 고육책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전쟁원흉들을 직접 타격하지 않고, 멀리 떨어진 지역에 억울한 피해자를 양산해버렸다는 면에서 미국도 악의 굴레에서 전적으로 자유롭기는 힘들어 보인다.
더구나 약삭빠른 일본은 ‘히로시마 평화기념관’을 건립해 원폭 피해상황을 적나라하게 진열함으로써 전범국이 아닌 원폭피해국으로 절묘한 코스프레를 하고 있다.
유관순 열사가 독립운동 주동자로 체포된 후 17세의 나이로 옥사한 지 올해로 100년이 됐다. 2020년은 일본이 간도에서 조선인들을 대학살한 ‘간도참변’ 100년이 지난 해기도 하다.
일본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한민족에게 숙명과도 같은, 풀리지 않는 숙제다.

한국아파트신문사 kslee@hapt.co.kr

<저작권자 © 한국아파트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3
default_setImage2

최신기사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