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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 산책의 마지막 발걸음을 서오릉과 서삼릉으로 옮긴다. 두 곳이 서로 멀지 않은 거리에 있어 둘러보는 데 하루면 넉넉하다. 서오릉에는 동구릉 다음으로 많은 5기의 능(陵) 외에도 2기의 원(園)과 1기의 묘(墓)가 있다. 서삼릉은 각각 3기의 능과 원, 그리고 수십 기의 묘에 왕자·왕녀의 태실까지 모여 있는 조선 왕실 최대의 집장묘역이다. 서오릉과 서삼릉을 다시 찾는 이유는 능들의 위세에 눌려 눈에 잘 띄지 않는 원·묘와 태실을 둘러보기 위해서다. 능・원・묘가 한데 모인 조선 왕실의 집장묘역서오릉에는 창릉(예종), 경릉(추존 덕종), 명릉(숙종), 익릉(인경왕후), 홍릉(정성왕후) 등 다섯 능 외에도 순창원과 수경원, 그리고 이미 소개한 적이 있지만 흔히 장희빈으로 불리는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 장씨의 대빈묘(大嬪墓)가 있다.순창원(順昌園)은 명종과 인순왕후 심씨의 첫아들인 순회세자(順懷世子)와 공회빈(恭懷嬪) 윤씨의 합장 원이다. 순회세자는 1551년(명종 6) 원자로 태어나 1557년 왕세자에 책봉되고, 1561년 윤씨와 가례를 올렸으나 1563년(명종 18) 13세로 요절했다. 세자가 세상을 떠나자 시호를 순회로 정하고, 추존 덕종(의경세자)의 경
유병갑의 조선왕릉 산책
유병갑
호수 1302
2023.02.18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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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실의 무덤은 묻힌 이의 신분에 따라 능·원·묘 세 형태로 구분된다. 추존왕을 포함한 왕과 왕후의 무덤인 능(陵), 왕세자와 왕세자빈, 왕세손, 왕의 사친(왕을 낳은 후궁이나 왕족)의 무덤인 원(園), 나머지 왕족과 폐왕의 무덤인 묘(墓)다. 27명의 조선 왕 중 반정으로 폐위돼 능이 아닌 묘에 잠든 두 사람이 있다. 중종반정으로 폐위된 연산군(燕山君)과 인조반정으로 폐위된 광해군(光海君)이다. 연산군, 생모 그리움에 폭정 치달아 연산군(재위 1494~1506)은 성종의 맏아들로, 1476년(성종 7) 계비 윤씨에게서 태어났다. 연산군의 생모 윤씨(1455~1482)는 함안부원군 윤기견(尹起畎)의 딸로, 1473년(성종 4) 성종의 후궁으로 간택됐다. 이듬해 성종의 첫 번째 왕비 공혜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1476년 두 번째 왕비로 책봉됐다. 그러나 왕비가 된 후 후궁들을 투기한 죄로 1479년(성종 10) 폐출된 지 3년 후에 사사됐다.생모가 폐위되자 원자였던 연산군은 성종의 세 번째 왕비 정현왕후 윤씨 손에서 자랐다. 그는 1483년(성종 14) 왕세자로 책봉되고, 1494년 성종이 세상을 떠나자 19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그는 부왕 성
유병갑의 조선왕릉 산책
유병갑
호수 1300
2023.02.04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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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기 조선왕릉 중 남한에 있는 40기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있다. 북한에 소재한 두 기의 능은 거기서 빠져 있다. 하나는 태조의 첫 번째 부인 신의고황후 한씨의 제릉이고, 다른 하나는 정종과 정안왕후의 후릉이다. 태조 첫부인 한씨, 8남매 키우며 내조태조의 첫 번째 부인으로 향처(鄕妻)인 신의고황후 한씨(1337~1391)는 안변이 본관인 안천부원군(安川府院君) 한경(韓卿)의 딸로, 1337년(고려 충숙왕 복위 6) 함남 안변에서 태어났다. 열다섯 살 되던 1351년(고려 공민왕 즉위) 이성계와 혼인했다. 실록에는 이성계가 고려의 장수로 수십 년 동안 전쟁터를 오가느라 집안을 보살필 여유가 없었는데, 부인 한씨가 집안을 다스려 뒷바라지했다고 기록돼 있다. 또 그녀는 투기하지 않는 성품으로 첩과 시종들을 예(禮)로써 대우했다고도 쓰여 있다.한씨는 이성계와의 사이에 방우(진안대군), 방과(정종), 방의(익안대군), 방간(회안대군), 방원(태종), 방연 등 아들 여섯을 뒀다. 고려의 관직을 역임한 맏이 방우는 조선 개국 이듬해 술병으로 죽었다. 셋째 방의는 제2차 왕자의 난 때 관직을 사퇴하고, 태종 즉위 후 만년에는 병으로 두문불출하다가 4년 뒤에
유병갑의 조선왕릉 산책
유병갑
호수 1298
2023.01.13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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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 가을 시작한 조선왕릉 산책이 막바지에 이르렀다. 42기 조선왕릉 중 남한에 있는 40기의 마지막 두 능이 함께 있는 경기도 남양주로 다시 향한다. 격동하는 근대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나라의 몰락을 지켜봐야 했던 대한제국의 두 황제 고종과 순종 부자가 잠든 곳, 홍릉과 유릉을 둘러보기 위해서다. 고종태황제, 일본에 의해 강제 퇴위고종(1852~1919, 왕 재위 1863~1897, 황제 재위 1897~1907)은 남연군의 넷째 아들 흥선군(興宣君, 후에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로, 1852년(철종 3) 한성부 정선방 사저(현 운현궁)에서 태어났다. 남연군은 인조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의 6대손으로, 정조의 이복동생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됐다. 고종의 아명은 명복(命福)이었다. 1863년 철종이 후사 없이 죽자 순조의 맏아들 효명세자(추존 익종)의 부인으로, 흔히 조대비라 불리는 신정왕후 조씨(당시 대왕대비)는 흥선군과 손을 잡았다. 그녀는 안동 김씨의 권력 독점을 견제하기 위해 명복을 자신과 죽은 남편 익종의 양자로 삼아 대통을 잇도록 했다. 왕위 계승자가 된 명복은 익성군(翼成君)에 봉해지고, 관례를 행한 후 왕위에 올랐다.열두 살의 어린 왕을 대신
유병갑의 조선왕릉 산책
유병갑
호수 1296
2022.12.31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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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김포와 파주 말고 멀리 강원도 영월에도 장릉으로 불리는 또 하나의 능이 있다. 비운의 소년 임금 단종의 능이다. 조선왕릉 중 건원릉(태조), 정릉(靖陵, 중종)과 더불어 왕후 없이 임금 홀로 묻힌 3기의 능 중 하나다. 단종(1441~1457, 재위 1452~1455)은 문종의 세자 시절이던 1441년(세종 23)에 태어났다. 태어난 다음 날 어머니 세자빈 권씨(훗날 현덕왕후)가 세상을 떠나, 이후 세종의 후궁 혜빈 양씨 손에 자랐다. 그는 1448년(세종 30) 왕세손에 책봉되고, 1450년 아버지가 왕위에 오르자 왕세자가 됐다. 1452년 문종이 세상을 떠나자 열두 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청령포에 유배된 17세 소년 왕 단종장릉을 둘러보기에 앞서 청령포로 향한다. 영월 읍내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청령포는 남한강의 지류인 영월 서강이 삼면을 감싸 흐르고, 유일하게 육지에 접한 남쪽은 가파른 산으로 막혀 있다. 지금도 배를 타야 갈 수 있는 곳으로 사실상 섬이나 다름없는 곳이다. 숙부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상왕으로 물러난 단종은 1457년(세조 3) 6월 21일(음) 노산군으로 강봉돼 이곳에 유배됐다. 세조실록에는 ‘궁에서 내보내 영월에 거주시켰다
유병갑의 조선왕릉 산책
유병갑
호수 1294
2022.12.1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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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남양주시 광릉 국립수목원 옆 죽엽산 자락에는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가 묻힌 광릉이 있다. 조선의 왕 중 태종보다 더 많은 사람의 피로 얼룩진 권좌에 앉았던 군주와 그 못지않게 야심만만했던 배우자가 살아서 누렸을 권력만큼이나 넓은 능역을 차지하고 잠들어 있다. 계유정난으로 조카 왕위 빼앗아세조(世祖, 1417~1468, 재위 1455~1468)는 아버지 세종이 충녕대군 시절인 1417년(태종 17)에 태어났다. 세종은 정비인 소헌왕후 심씨에게서 8남, 영빈 강씨, 신빈 김씨, 혜빈 양씨 등 5명의 후궁에게서 10남 등 모두 18명의 왕자를 뒀다. 후궁 다섯이 더 있었으나 그들에게선 자식이 없었다. 세조는 소헌왕후 소생의 둘째로, 열여덟 왕자 중에서도 둘째로 태어났다.그는 아버지가 왕위에 오른 후인 1428년(세종 10) 대광보국 진평대군(大匡輔國 晉平大君)에 봉해졌고, 그해 윤번(尹璠)의 딸과 가례를 올렸다. 1433년(세종 15)에는 함평대군(咸平大君)으로 고쳐 봉해졌으나 함흥(咸興)의 별칭인 함평이 전라도 함평현(咸平縣)과 혼동될 수 있어 며칠 후 진양대군(晉陽大君)으로 다시 고쳤다. 1445년(세종 27)에는 황해도 해주의 옛 지명인 수양부(首陽府)의
유병갑의 조선왕릉 산책
유병갑
호수 1292
2022.12.03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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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파주시 탄현면에 위치한 장릉(長陵)은 인조와 그의 첫 번째 왕비 인열왕후 한씨의 합장릉이다. 파주 장릉은 지난 호에 소개한 추존왕 원종과 인성왕후 구씨의 쌍릉인 김포 장릉과 일직선 축에 자리해 아들 내외가 멀리 뒤에서 부모를 바라보는 형국이다. 인조(仁祖·1595~1649, 재위 1623~1649)는 선조의 손자다. 그의 아버지는 선조와 후궁 인빈 김씨의 5남 정원군(추존 원종)이다. 임진왜란 당시인 1595년 정원군 내외가 황해도 해주 쪽으로 피난을 갔을 때 그곳에서 장남 인조가 태어났다. 어릴 적 그의 넓적다리에 사마귀가 여러 개 있어서 이를 본 할아버지 선조가 ‘한(漢) 고조와 같은 상이니 누설하지 말라’고 했다고 실록은 전한다.정원군은 네 아들을 뒀는데, 장남 인조는 1607년 능양도정(綾陽都正)에 이어 능양군(綾陽君)에 봉해졌다. 그의 형제들로는 이복동생인 차남 능풍군, 동복동생인 3남 능원군과 4남 능창군(두 동복은 인조 즉위 후 대군으로 승봉됨)이 있었다. 이들 중 막내 능창군은 1615년 일부 서인(西人)들이 그를 왕으로 추대하려던 역모가 발각되면서 광해군에게 죽임을 당했다. 능창군을 잃은 아버지 정원군은 남은 아들들을 잃게 될까 노심초사
유병갑의 조선왕릉 산책
유병갑
호수 1290
2022.11.19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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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로는 각각 다르나 우리 말로는 모두 장릉이라는 이름을 가진 조선왕릉 세 기가 있다. 단종의 영월 장릉(莊陵), 추존왕 원종과 인헌왕후의 김포 장릉(章陵), 그리고 인조와 인열왕후의 파주 장릉(長陵)이다. 김포 장릉은 선조의 다섯째 아들로,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元宗)과 어머니 인헌왕후(仁獻王后) 구씨의 쌍릉이다.조선에는 살아서 왕위에 오른 적은 없으나 사후에 왕으로 올려진 추존왕이 아홉 명 있다. 우선 태조의 아버지부터 고조부에 이르는 4대조가 각각 환왕·도왕·익왕·목왕을 거쳐 태종 때 다시 환조(桓祖)·도조(度祖)·익조(翼祖)·목조(穆祖)로 추존됐다. 세조의 맏아들 의경세자(덕종 德宗), 인조의 사친 정원군(원종 元宗), 영조의 맏아들이자 정조의 양부 효장세자(진종 眞宗), 영조의 둘째 아들로 정조의 생부 사도세자(장조 莊祖), 순조의 맏아들 효명세자(문조 文祖)도 사후에 왕 또는 황제로 추숭됐다.이중 원종의 추존되기 전 군호는 정원군(定遠君)이었다. 선조는 원비 의인왕후와의 사이에서는 자녀가 없었고, 계비 인목왕후와 공빈 김씨 등 여섯 후궁(실제 후궁은 더 많았다)에게서 모두 열네 명의 왕자를 낳았다. 그중 인목왕후의 외아들로 이복형 광해군에 의해 유
유병갑의 조선왕릉 산책
유병갑
호수 1288
2022.11.05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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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과 원경왕후의 쌍릉인 헌릉 서쪽 언덕에는 순조숙황제와 순원숙황후의 합장릉인 인릉이 자리 잡고 있다. 헌릉과 마찬가지로 인릉은 우회 관람로를 통해 능침 근처까지 올라갈 수 있다. 부분적으로나마 석물들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조선왕릉 중 하나다. 순조의 아버지 정조는 세손 시절 세손빈으로 맞아들인 정비 효의왕후 김씨 외에 의빈 성씨, 원빈 홍씨, 화빈 윤씨, 수빈 박씨 등 네 명의 후궁을 뒀다. 효의왕후와의 사이에서는 자식이 없었고, 홍국영의 누이동생으로 첫 번째 간택 후궁이었던 원빈 홍씨는 자식 없이 일찍 죽었다. 두 번째 간택 후궁 화빈 윤씨도 딸을 하나 낳았으나 어려서 죽었다.정조가 가장 총애했던 의빈 성씨는 문효세자를 낳았다. 지난해 겨울 인기리에 방영된 ‘옷소매 붉은 끝동’이란 드라마가 있었다. 정조와 후궁 의빈 성씨를 주인공으로 한 사극이었다. 드라마의 여주인공 ‘성가(成哥) 덕임’은 ‘궁인 성씨’로 실록에 처음 등장한다. 1782년(정조 6) 궁인 성씨가 정조의 첫아들(문효세자)을 낳았다는 기록이다. 순조・순원왕후 묻힌 인릉 일대는 영릉과 희릉이 들어섰던 곳명당이 흉당 되고, 그 흉당 자리가 다시 명당이 되어…순원왕후 수렴청정만 두
유병갑의 조선왕릉 산책
유병갑
호수 1286
2022.10.22 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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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 폭우 피해 복구 중이어서 방문을 미뤘던 서울 서초구 내곡동 헌·인릉으로 간다. 이곳에는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헌릉(獻陵), 그리고 순조와 순원황후 김씨의 인릉(仁陵)이 이웃해 있다. 두 능이 자리잡은 대모산은 조선시대에 경기도 광주 (廣州) 땅이었다. 우선 헌릉부터 둘러본다. 이방원, 조선 건국에 공을 세우다 태종 이방원(李芳遠 1367~1422, 재위 1400~1418)은 1367년(고려 공민왕 16) 이성계와 그의 향처(鄕妻) 한씨 사이의 다섯째 아들로, 함흥에서 태어났다. 1383년(고려 우왕 9) 17세때 문과인 병과(丙科)에 7등으로 급제해 고려의 관리가 됐다. 조선의 왕중 유일하게 과거에 급제한 기록을 가졌 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당시 방원은 개경에 있던 어머니와 동생들을 피신시켜 가족을 지켰다. 아버지와 그를 도우러 간 형들을 대신한 것이다. 또 이성계가 사냥 중 낙마해 중상을 입고 벽란도에 머무는 동안 정몽주를 중심으로 한 신진사대부 세력이 이성계와 그 지지자들을 제거하려 한 일이 있었다. 이 때 생모 한씨의 3년상 시묘(侍墓) 중이던 방원은 벽란도로 달려가 아버지를 개경으로 옮겨오는 한편, 군사를 일으켜 이성계 일파를 위기에서
유병갑의 조선왕릉 산책
유병갑
호수 1284
2022.10.08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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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시대, 자식을 왕으로 만들고 그 왕권을 공고히 하고 싶은 어머니의 욕망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왕위에 오른 어린 아들을 대신해 왕보다도 강한 권력을 휘둘렀다면 이는 권력남용이 분명하다. 오늘은 이런 사연을 가진 모자가 산등성이 하나를 두고 이웃해 잠들어 있는 곳을 가본다. 서울 노원구 공릉동에 있는 문정왕후의 태릉과 명종의 강릉이다. 중종 아들들의 왕위계승 세력다툼반정세력의 강압으로 폐출된 단경왕후에 이어 중종의 첫 번째 계비가 된 장경왕후는 1515년(중종 10) 원자(훗날 인종)를 낳은 뒤 산후병으로 7일 만에 세상을 떴다. 이에 원자의 외숙부이자 장경왕후의 오빠인 윤임(尹任)의 천거로 간택된 문정왕후가 1517년 두 번째 계비로 책봉됐다. 제11대 임금 중종의 세 번째 왕비 문정왕후(文定王后, 1501~1565)는 파산부원군 윤지임(尹之任)의 딸로, 제12대 인종의 계모이자 제13대 명종의 친모다. 같은 파평 윤씨 가문의 장경·문정왕후는 삼당고모·조카 관계(9촌)였다. 이들 두 계비가 낳은 아들들의 왕위계승을 두고 다툼이 중종, 인종을 거쳐 명종 즉위 초까지 계속됐다. 장경왕후의 오빠 윤임을 축으로 하는 대윤(大尹)과,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
유병갑의 조선왕릉 산책
유병갑
호수 1282
2022.09.24 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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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호 서울 강남구 한복판 선·정릉에 이어 이번 호에는 서초구에 있는 헌·인릉을 방문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며칠 전 수도권에 쏟아진 폭우로 무너진 능역을 복구하기 위해 일시 휴관한다기에 행선지를 바꿨다.이미 얘기했듯이 중종에게는 세 명의 왕비가 있었지만 그중 누구와도 함께 묻히지 못하고 본인과 왕비 세 사람이 각각 다른 곳에 잠들어 있다. 두 번째 왕비 장경왕후의 희릉은 앞서 소개했고, 오늘은 첫 번째 부인으로 중종반정을 일으킨 세력의 강압에 의해 폐출(廢黜)됐다가 죽은 후에 복위된 단경왕후 신씨의 능을 찾아간다. 경기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에 있는 온릉이다.조선의 왕비 중에는 두 명의 신씨가 있었는데 둘 다 거창 신씨(居昌 愼氏)다. 한 사람은 연산군의 부인으로, 다른 한 사람은 그의 열두 살 아래 이복동생인 중종의 부인으로 동서지간이었다. 손윗동서는 익창부원군 신수근(愼守勤)의 누이였고, 손아랫동서는 그의 딸이었으므로 두 사람은 친정 고모와 조카 사이기도 했다.연산군의 부인 신씨는 거창부원군 신승선(愼承善)의 딸이자 신수근의 누이동생이다. 1488년(성종 19) 세자 시절의 연산군과 가례를 올리고 세자빈이 됐다. 당시 병조판서였던 신승선은 연산군이 왕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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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병갑
호수 1280
2022.09.03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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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에는 한성부 밖 경기도 광주(廣州) 땅이었던 서울 강남구 한복판. 흔히 ‘선정릉’으로 불리는 두 기의 왕릉이 자리하고 있다. 성종과 정현왕후의 선릉(宣陵) 그리고 중종의 정릉(靖陵)이다. 죽은 후 외침(外侵)으로 수모를 당한 부부와 아들의 사연이 묻혀 있는 곳이다. 인종(仁宗)이 될 뻔한 성종(成宗)성종(1457~1494, 재위 1469~1494)은 세조의 장남 의경세자(훗날 덕종으로 추존)와 세자빈 한씨(훗날 소혜왕후 또는 인수대비)의 둘째 아들이다.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아버지 의경세자가 요절하자 할아버지 세조는 그를 잠시 궁중에서 키우다 사저로 내보냈다. 다섯 살이 되던 1461년(세조 7) 세조는 그를 잘산군(乽山君· 또는 者乙山君)에 봉했다. 그 후 1469년 숙부 예종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그의 운명이 바뀐다. 당시 예종에게는 친아들 제안대군이 있었고, 잘산군에게는 친형 월산군이 있었다. 그러나 왕실의 최고 어른인 할머니 정희왕후는 남편 세조 때부터 막강한 권신이었던 한명회, 신숙주 등과 상의해 잘산군을 왕위 계승자로 정한다. 제안대군은 어리고 월산군은 병약하다는 이유였지만 잘산군의 장인 한명회 덕이었다. 잘산군은 예종의 양자로 입적돼
유병갑의 조선왕릉 산책
유병갑
호수 1278
2022.08.20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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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구리, 고양, 파주 등 주로 서울 밖 경기 지역에 있는 능들을 둘러봤는데, 오늘은 서울 시내에 위치한 능 한 곳을 찾아간다. 성북구 정릉동에 있는 정릉이다. 서울에 정릉이란 이름의 능 두 기가 있다. 태조의 왕비 신덕왕후 강 씨의 정릉(貞陵)과 강남 한복판 선·정릉 내에 있는 중종의 정릉(靖陵)이다. 오늘은 앞의 정릉을 살펴본다.조선의 도읍 한양(漢陽)의 공식 명칭은 한성부(漢城府)였다. 지금의 서울에 비하면 매우 좁았다. 동·서·남·북으로 난 사대문(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 숙정문)의 안쪽 지역을 뜻하는 ‘사대문 안’과 사대문 밖 10리(약 4㎞) 이내 지역을 말하는 ‘성저십리(城底十里)’가 한성부에 해당했다. 강남 등 오늘날 서울의 많은 지역이 조선시대에는 모두 성외(城外) 지역으로 경기도였다.현재 행정구역상 서울에 소재한 헌·인릉(서초구), 선·정릉(강남구), 태·강릉(노원구), 의릉 및 정릉(성북구) 등도 조선 당대에는 모두 도성 밖 경기도에 속해 있었다. 고려 때부터 도성 안에는 능묘를 쓰지 못하게 했던 원칙 때문이었다. 하지만 신덕왕후의 정릉은 원래 도성 한복판에 있었다.태조 이성계는 조선 건국 이전에 두 명의 정실부인을 뒀다. 훗날 신
유병갑의 조선왕릉 산책
유병갑
호수 1276
2022.07.30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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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8년 태조의 건원릉을 필두로 한 동구릉 아홉 기의 능 중 19세기 중반 이후 조성된 두 기가 있다. 20대 초에 요절한 아버지와 아들의 사연이 묻혀있는 수릉과 경릉이다. 강인한 군주 자질 보이며 인재 등용했지만수릉(綏陵)은 추존 문조익황제(文祖翼皇帝)와 신정익황후(神貞翼皇后) 조씨의 합장릉이다. 효명세자로 더 잘 알려진 추존 황제 문조(1809~1830)는 순조와 순원황후 김씨의 외아들로 1809년(순조 9)에 태어났다.1812년(순조 12) 네 살 때 왕세자로 책봉됐는데, 숙종 이후 처음으로 정실 왕비에게서 나은 원자가 세자로 책봉된 경우다. 그는 1819년(순조 19) 풍은부원군 조만영(趙萬永)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이했다. 훗날 고종 때 수렴청정을 한 조대비다.병치레가 잦아 정사를 제대로 볼 수 없었던 순조는 1827년(순조 27) 왕세자의 청정(廳政·대리청정)을 명했다. 선위나 대리청정 선언은 임금의 신하들에 대한 군기 잡기나 충성심 테스트 수단으로 종종 이용됐다. 이를 덥석 받아들였다가는 자칫 불충이나 심하면 역심으로 비춰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따라서 임금의 건강 상태로 봐 불가피하더라도 한 두 번쯤은 반대하거나 고사하는 게 관례였다. 그러나
유병갑의 조선왕릉 산책
유병갑
호수 1274
2022.07.17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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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덮인 지난 연말에 이어 반년 만에 동구릉을 다시 찾았다. 낯선 방문객을 경계라도 하듯 산새가 쉴새 없이 지저귀고 이따금 꿩이 우는 소리가 초여름 동구릉 숲길의 정적을 깬다. 동구릉 아홉 기의 능 중에서 이미 소개한 다섯 외에 남은 네 기의 능을 이번 호와 다음 호, 두 차례에 걸쳐 안내한다. 오늘은 왕 없이 왕후 홀로 외로이 잠든 두 능으로 향한다. 휘릉,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능인조에게는 인열왕후와 장렬왕후, 두 명의 왕비가 있었다. 첫 번째 왕비 인열왕후 한씨는 1635년(인조 13) 여섯 번째 아들을 낳고 산후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듬해 파주(운천리)에 장사지냈는데, 이때 인조의 능자리도 미리 마련해뒀다. 그 후 1649년 인조가 세상을 떠나자 그녀 곁에 쌍릉 형태로 능을 조성했다. 장릉에 화재가 자주 일어났고 능침 사이에 뱀이 똬리를 트는 변이 계속되자 1731년(영조 7) 지금의 파주(탄현면 갈현리) 장릉 자리로 천장하면서 합장릉으로 만들었다.원비 인열왕후가 죽은 지 2년 후 대신들은 조속히 계비를 맞아들일 것을 건의했다. 인조는 계비를 들이는 일이 국가에 유익하기보다는 해독이 크고 인열왕후의 3년 상도 끝나지 않았다며 재취하지 않겠다는 뜻을
유병갑의 조선왕릉 산책
유병갑
호수 1272
2022.07.02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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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북구 석관동에 위치한 의릉은 경종(1688 ~1724, 재위 1720~1724)과 왕비 선의왕후(1705 ~1730)의 능이다. 선의왕후는 경종의 세자시절 두 번째 빈이다. 첫 번째 세자빈으로 일찍 세상을 떠난 후 경종이 왕이 되면서 왕후로 추존된 단의왕후의 능인 혜릉은 동구릉에 있다.1688년(숙종 14) 숙종과 당시 소의였던 장씨(흔히 장희빈으로 불림) 사이에서 태어난 경종은 우리 나이 세 살 때 왕세자로 책봉됐다. 세자가 서른 살이던 1717년 숙종은 노론의 핵심 인물 좌의정 이이명을 불러들여 독대하고, 두 달 후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하게 한다.세자가 대리청정하는 동안 그를 지지하는 소론(少論)과 그의 이복동생 연잉군(延礽君, 훗날 영조)의 지지 세력인 노론(老論) 사이에 대립이 심화했다. 3년 후인 1720년 숙종이 세상을 떠나자 세자가 왕위에 올랐다. 그가 경종이다. 이복동생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경종 즉위 이듬해인 1721년(경종 1), 후사가 없던 그의 후계자를 세우는 일에 대한 논의가 제기된다. 노론계의 총대를 멘 사간원 정언 이정소가 ‘하루속히 저사(儲嗣, 왕위 계승자)를 세울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린다.영의정 김창집, 좌의정 이건명
유병갑의 조선왕릉 산책
유병갑
호수 1270
2022.06.18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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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삼릉 북쪽으로 좀 떨어진 곳에 삼릉이라 불리는 또 다른 왕릉군이 있다. 경기 파주 삼릉이다. 공릉, 순릉, 영릉 등 차례대로 조성된 세 기의 능이 이곳에 모여있다.조선조 가장 많은 왕비를 배출한 가문은 청주 한씨로, 모두 여섯 명이었다. 이들 중 태조의 첫 부인 신의고황후와 인조비 인열왕후를 제외하고 네 명은 세조의 며느리 또는 손주며느리였다. 세조의 요절한 맏아들 의경세자(추존 덕종)의 비, 그 동생 예종의 원비와 계비, 그리고 의경세자의 아들 성종의 원비 또한 한씨였다. 파주 삼릉에는 이들 세조 집안의 4명의 한씨 며느리 중 예종과 성종의 원비였던 장순왕후와 공혜왕후가 잠들어 있다. 세조 때의 권신 한명회(韓明澮)의 두 딸이다. 예종의 원비 장순왕후로 공릉(恭陵)에 잠든 언니공릉은 제8대 임금 예종(睿宗)의 첫 번째 왕비 장순왕후(章順王后) 한씨(1445~1462)의 능이다. 상당부원군 한명회의 셋째 딸이었던 장순왕후는 조선의 왕비 중 헌종의 원비 효현왕후(16세) 다음으로 젊은 나이에 죽은 왕비였다. 그녀의 아버지 한명회는 과거에 번번이 낙방하고 나이 서른여덟에 음서로 관직에 진출, 개성의 경덕궁직이라는 말직으로 있었다. 그러나 수양대군의 책사가 돼
유병갑의 조선왕릉 산책
유병갑
호수 1269
2022.06.04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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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에 강도(江都), 때로는 심도(沁都)라고도 기록돼 있는 강화도는 고려와 조선 시대 왕이나 왕족들의 단골 유배지였다. 섬이라서 고립이 용이하면서도 개경이나 한성 등 도성과 가까워 감시·통제 또한 쉬웠기 때문이다.고려 때 희종, 고종, 우왕, 창왕 등이, 조선 시대에는 연산군, 광해군 등 폐위된 두 왕과, 안평대군, 임해군, 영창대군 등이 강화도에 유배됐다. 오늘날의 강화도는 조선 시대엔 강화부(江華府)와 교동현(喬桐縣 또는 교동부)으로 나뉘었다. 유배된 이들은 상황에 따라 강화와 교동을 오가며 배소가 옮겨지기도 했다. 서삼릉 내 예릉의 주인공도 그중 하나였다. 흔히 강화도령이라 불리는 철종(哲宗)이다. 사도세자 증손자, 졸지에 왕위에 철종(1831~1863)은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 이광의 서자(3남)다. 이광은 사도세자의 후궁 숙빈 임씨의 아들 은언군(恩彦君)의 서자다. 따라서 철종은 사도세자의 증손자다.그의 할아버지 은언군은 정조의 후궁 원빈 홍씨(홍국영의 동생)가 죽은 후 자신의 맏아들을 그녀의 양자로 들여 왕위를 잇게 하려다 역모 혐의로 1786년(정조 10년) 식솔들과 함께 교동으로 유배됐다. 은언군은 1801년(순조 1) 신유박해 때 부인
유병갑의 조선왕릉 산책
유병갑
호수 1266
2022.05.14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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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62호에 희릉을 소개하면서 언급했지만 서삼릉에는 희릉에 잠든 장경왕후의 아들 인종과 그의 비 인성왕후의 쌍릉인 효릉이 함께 있다. 아들을 낳은 지 7일 만에 세상을 떠난 어머니와 아들이 죽어서나마 이웃해 있는 것이다. 효릉은 일반인 출입제한 지역이라서 소개할 의미가 있을까 하는 망설임도 있었다. 하지만 더 많은 이들에게 실상을 알려 관심을 촉구함으로써 능 개방이 앞당겨질 수도 있으리란 기대감도 있다. 효성 지극해 부왕은 물론 계모에게도 효도 조선의 임금 중 가장 짧은 기간 재위한 인종(1515~1545)은 중종의 두 번째 왕비 장경왕후에게서 태어났다. 여섯 살에 세자로 책봉돼 왕위에 오를 때까지 24년여를 세자로 지냈다. 1544년 중종이 죽고 닷새 후인 11월 20일(이하 음력)에 즉위, 이듬해 7월 1일 서른한 살로 죽었으니 윤달을 포함, 여덟 달 남짓 왕위에 있었던 셈이다.조선왕조 실록에 따르면 인종은 이미 세 살 때 글을 익힐 정도로 총명해 부왕 중종의 사랑을 받았으며 여덟 살에 성균관에 입학했다. 그는 성품이 침착하고 공손하며, 말수가 적고 조용하며, 검약해 욕심이 없었다고도 기록돼 있다. 효성이 지극해 아버지 중종을 극진히 섬겼으며, 자신
유병갑의 조선왕릉 산책
유병갑
호수 1264
2022.04.30 09:00